국보탐미단 1 : 강화도 1

국보탐미단 1 : 강화도 1

 

한의사 장종선의 국보탐미단 1 - 강화도 1


강화도 장정리 오층석탑, 석조여래입상, 봉천대
















눈 내린 토요일 오후, 강화도
차가 생기고 영종도와 강화도를 매우 자주 들렀다.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차로 가깝다는 이유일 것이다. 서해는 역시 일몰이 예술이다. 내 인생 최고의 일몰지는 000이다. 요즘도 자주 찾아가는데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조만간 일몰성지로 떠오를 곳이지만 그때까지는 아껴두고 싶다. 아직은 사람이 없고 한가한 편이라 부담 없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얼마 전 토요일에는 강화도로 차를 몰았다. 3월인데도 눈이 온 토요일이었다. 눈 쌓인 강화도는 처음 가봤는데 모든 풍경이 낯설었고, 아침에 눈이 오고 날이 개서, 미세먼지가 없어져 공기질이 매우 좋아 멀리까지 깨끗하게 보였다. 멀리 보이는 강화도의 산등성이 위로 눈이 쌓여 커다란 늙은 백호가 앉아 나를 바라보는 듯 영험한 기분이었다. 본투비문과의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다.


장정리 오층석탑
오늘 소개할 보물은 강화도의 “장정리 오층석탑”(보물)과 “장정리 석조여래입상”(보물)이다. 화점면 오층석탑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행정구역상 화점면 장정리이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몽고군을 피해 고려의 수도가 옮겨진 곳이다. 강화천도(주1). 제법 오랜 기간 강화도라는 섬에서 피난생활을 했었기에 고려시대 왕과 귀족들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있던 여러 지명이나 사찰 등을 그대로 강화도에 옮겨 이름 붙였다. 개성을 그리워해서 그랬던 것이다. 당시 개성에 있던 큰 사찰인 봉은사奉恩寺를 그대로 이름을 따서 강화도 화점면 장정리에 봉은사라고 이름 지은 사찰을 지었다. 『고려사』의 봉은사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사 고종21년(1234년) 3월 15일(양력) 癸未日 “癸未 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爲奉恩寺, 撤民家, 以廣輦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宮殿·寺社號, 皆擬松都. 八關·燃燈·行香道場, 一依舊式.” 

“계미 연등, 왕여봉은사. 이고참정차척가위봉은사, 철민가, 이광연로, 시수천도초창, 연범구정·궁전·사사호, 개의송도. 팔관·연등·행행도장, 일의구식.”

“계미일. 연등회가 열려 왕이 봉은사에 갔다. 이런 까닭에 참정(參政) 벼슬인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奉恩寺)로 삼고, 민가를 철거하여 임금이 거둥하는 길[연로, 輦路]을 넓혔다. 당시 비록 천도한 초창기이기는 하지만 격구장(구정毬庭)과 궁전(宮殿), 절[寺社] 등의 이름은 모두 개경[송도, 松都]의 것을 따랐다.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행향도량(行香道場)(주2)은 하나같이 옛 법식을 따랐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자료에 음역을 달고 번역을 약간 손 봄.


봉은사는 개성에서 꽤나 비중 있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봉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주3)로 광종 2년(951년)에 창건되어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었으며, 고려시대 국찰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천도시기에 고려왕과 귀족은 강화도 신하의 땅을 빼앗아 개성 봉은사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봉은사라 이름 짓고 불교행사를 진행했다한다. 당시 개경에서의 행사를 그대로 했다하니 꽤 규모가 크고 화려했을 것이다. 피난 중에도 이러한 생활을 했으니 고려의 왕 및 귀족과, 하층민의 삶은 매우 괴리가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현재 장정리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있던 곳을 봉은사가 있던 곳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발굴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점면 장정리 오층석탑은 절터라고 보긴 어려운 제법 깊은 산중턱에 기단을 쌓고 좌측에는 우물터가 있고, 우측에 오층석탑이 존재한다. 맞은편 산 능선을 하나 넘어 위치하는 석조여래입상도 봉은사와 관련된 유물로 보이기에 실제 봉은사로 사용했던 곳은 꽤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정리 오층석탑은 깊숙한 곳에 있지만 차가 가까운 곳까지 올라간다. 도로에는 눈이 다 녹았지만 산길에는 아직 눈이 쌓여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경인데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사람발자국이 여럿 있었다. 나만 이런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구나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어쨌든 현재 나는 눈 내린 산속에 혼자 있다. 그리고 약간 경사진 곳 위쪽에 장정리 오측석탑이 서있다. 약간 올려다보는 느낌이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컸고 삐뚤빼뚤한 게 조형미가 없어보였는데, 이상하게 추한 느낌이 아니고 자연미로 느껴졌다. 눈 내린 서늘한 산속에 탑에만 햇살이 비추는 듯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탑을 한 바퀴 돌아봤다. 미술사학쪽에선 그다지 큰 점수를 주지 않는 탑이지만 보물이라는 의미를 생각지 않더라도 현재 내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기이한 조형물이었다.



탑 앞의 안내문에 따르면 탑의 돌들은 1960년 발견될 때까지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한다. 1960년에 탑 돌을 모아 현재위치에 세웠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은 안내문에 따르면 ‘강화천도시 봉은사도 같이 옮겨왔다’는 것인데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위에 인용한 『고려사』에 따르면 옮겨온 것이 아니고 강화도의 신하 차척의 집을 빼앗고 봉은사를 지었다고 명확히 나와 있다. 부족한 식견이지만 이 유물 안내판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봉천대
이 오층석탑을 뒤로하고 더 올라가면 봉천대奉天臺라는 역시 고려 때 유물이 나온다. 오층석탑과는 달리 일부러 깎은 듯 매우 반듯하게 돌로 쌓아 만들어진 제단인데, 나는 답사당시 봉천대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다. 이 유물은 보물은 아니고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18호 이다. 아마도 설립년도나 설립자등의 정확한 역사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찾아갈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석상각에 걸려있는 ‘봉씨들이 걸어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인지라 역사적으로 볼 때는 정확한 근거라 보기는 어렵다.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오층석탑을 뒤에 두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능선을 넘어 내려가면 바로 석조여래입상이다. 허나 차를 가져왔기에 다시 밑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길을 돌아 올라간다. 시간이 더 늦어 날이 약간 어둑해졌다. 좁은 길을 도랑에 빠질까 조심하며 올라간다.

석조여래입상 역시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의 조형적 요소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한다. 주차장 바로 옆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석조여래입상에 석상각을 짓고 둘레에 돌담을 둘렀다. 최근에는 입구에 작은 문을 세웠다. 과거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다. 미소를 띤 따뜻한 얼굴을 했다 하는데 약간 어둑해서 인지 나는 뭔가 근엄한 인상이었다. 할머니라기보다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집에서 글을 쓰면서 여러 사진들을 검색해보니 밤에 불을 비춘 모습이 매우 선명해서 그제야 다시 살펴보니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을 검색하고 이미지에서 밤에 밝은 조명을 비춘 모습 사진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저작권 문제도 있고 굳이 사진은 링크하지 않겠다.

지금부터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정리석조여래입상 江華長井里石造如來立像에 대한 설명 일부를 인용하고 주석을 다는 형식으로 살펴보겠다. 우리 답사는 내 감상만 늘어놔서는 발전이 없다. 공부를 하자.

“이 석불입상은 판석(板石)에 새겨진 것으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불신(佛身)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머리 정상에는 높고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다소 팽만감이 있지만 딱딱한 느낌이 들며, 각 신체도 평판 적이며 어깨나 팔 등은 역동성이 없다. 긴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크며,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수인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변형된 시무외인(施無畏印) 즉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착의법은 두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이며 깊게 새겨진 옷주름은 상체에서부터 하체에까지 넓은 U자형으로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두꺼운 옷주름으로 인해 신체의 양감은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왼쪽 가슴 부근에 몇 가닥의 주름이 삼각형을 이루며 어깨 뒤로 넘기고 있는 것은 고려전반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의 아래에는 군의(裙衣)의 자락이 발목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 발은 뒤꿈치를 맞붙이고 좌우로 벌린 모습으로 발가락까지 표현하였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 안쪽에는 둥근 무늬를 새기고 있다. 광배 윗부분의 가장자리에는 화염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판석(flagstone, 板石) : 비교적 얇고 평평하며 길이가 150~380mm정도인 암편 『토양사전』 [네이버지식백과]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 : 주형거신광배를 말한다. 광배光背에 대한 설명을 알아야 한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 광배의 종류에는 크게 머리에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①두광(頭光, siras-cakra)과 전신에서 발산하는 ②신광(身光, vali-cakra), ③거신광(擧身光)이 있다. ..... 신광은 두광과 함께 표현되며 신광만 나타내는 경우는 없다. 거신광은 입상이나 좌상에 관계없이 몸 전체를 감싸는 형태로 전신광(全身光)이라고도 한다. 형식에는 두광과 신광을 겹쳐서 표현한 ⑴이중원광(二重圓光)과 전체의 모양이 배와 같은 ⑵주형(舟形) 광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배 [光背]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소발(素髮), 육계(肉髻) : 소발은 민머리 또는 흰머리를 의미하고, 육계는 정수리 살이 솟아올라 상투가 되었다는 부처의 32가지 모습(삼십이상)중 하나를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십이상팔십종호 항목을 참고.

삼도三道 : 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기 주름. 두산백과 “삼도”항목에 그림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여원인(與願印)·시무외인(施無畏印) : 여원인은 왼손을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보여주면서 손가락을 편 모습이다. 4,5지는 구부리기도 한다. 시무외인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오려 손바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모두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여원인은 언제 기원이 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한국 삼국시대 불상에서는 거의 대부분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통상적으로 취하고 있다. 왼손은 여원인, 오른손은 시무외인인데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은 반대로 되어있다는 것.

통견(通肩) : 가사(袈裟)라 불리는 부처의 겉옷이 양어깨를 덮은 형식. 오른쪽만 내린 우견편단(右肩偏袒) 또는 편단우견(偏袒右肩)과 대비된다.

화염무늬 : 화염火焰무늬 불꽃무늬


이상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 일부에 주석을 달며 공부해보았다. 사실 장정리석조여래입상은 내겐 별 감흥을 주진 못했다. 그것보다 고려시대 강화천도시기 왕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 개경의 봉은사를 따서 강화에 봉은사라 이름 짓고 각종 불교행사를 열었던 모습을 떠올려보게 된다. 한편 조선 전기 절이 없어지고 방치되었던 봉은사의 석조여래입상을 봉씨가 자신들의 시조를 새긴 석상이라 여기고 석상각을 짓고 판각을 새겨뒀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아래 석상각에 실린 판각을 옮겨 실고 번역 및 주석을 달아보겠다.



“하음봉씨 시조 하음백봉우공은 고려 예종원년 서기1106년 병술 3월 7일 세상에 탄강하였으며 려사에 의하면 예종원년 3월 7일 새벽에 하음산하에 한 노파가 용연지(봉가지)로 물을 길으러 갔더니 그때에 황홀한 서기가 하늘로부터 연못에 뻗치며 우레같은 소리와 함께 수중에서 석함이 떠오름을 본 노파가 괴이여겨 인양개함하여 보니 외모가 단정한 귀공자가 누어있으므로 왕께 봉헌하여 궁중에서 양육하니 점차 성장함게 풍자가 준수하고 재지가 인인(引儿 ?)한지라. 노파가 봉헌하였다하여, 사성왈 봉이라하고 명왈 우라 명하다. 갑과에 급제관이 위위신?정당문학좌복사에 이르고 하음백을 봉하다. 왕명으로 공의 석상(보물615호)를 조탁하여 각을 건린수호하고 음 3월 7일 춘향을 봉행하며 각이 유구퇴락하여 1982년 8월 31일 문화공보국 당국에서 중건하다. 공의 묘는 각후편 임좌원에 재하고 하음산정에는 봉천대(사적37호)가 있으며 그 산록에는 오측석탑(보물10호)이 위치하다. 계해년(1983년) 3월7일 하음봉씨종친회“


사진과 비교해서 보시면 굳이 번역은 필요 없을 정도의 내용이고, 다만 석상각의 석조여래입상이 봉우의 석상이라는 역사왜곡은 나를 당황케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를 살펴보자.

“『봉씨호원록』(奉氏湖源錄)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힌 근대의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사찰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던 봉천우(奉天佑, 봉씨의 시조 봉우(奉禑)의 5대손)가 그 선조에 대한 은혜와 백성을 구호한 덕을 기념하고자 하늘에 제를 올리는 대(臺)와 사찰을 지었다. 이 대를 봉천대(奉天臺)라 하였고, 사찰 이름을 봉은사라 하였다. 조선 중기에 봉천대는 봉수로 이용되었다.’ 봉천우가 봉은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렵다. 봉천우의 생몰년대는 기록에 없으나 충숙왕 14년(1327)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낸 14세기 인물로 나타나고 있고, 봉은사는 이보다 100년 가까이 앞서 창건한 절이다. 아마도 봉천우의 '창건'은 고려왕조의 개경 환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봉은사의 '중창'일 가능성이 많다. 봉은사터에 남은 흔적이란 봉씨가의 시조로 곡해되고 있는 석조여래입상 1기가 유일하다.”

정리하면 『봉씨호원록』(奉氏湖源錄)을 토대로 작성된 1934년 안진호의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지금의 봉씨종친회가 작성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는데, 저자가 보기엔 거짓이라는 것이다. 봉천우는 고려사에 1327년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그보다 100년전(고려사에는 광종2년(951년) 창건으로 나온다하니 거의 400년전 창건이다) 창건된 봉은사를 창건 했을리 없고 폐허가 된 절을 중창했을 것이라는 거다. 


또한 이것은 내 생각인데, 어찌 일개 지방 관리를 위해 고려왕이 석상을 지으라 했다는 것인지 의아하고, 석상이 너무나 떡하니 불상의 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봉씨 시조 봉우라고 여긴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봉씨가문에서 보신다면 역정을 내실수 있겠으나 내가 확인할수 있는 자료들을 참고해서 내린 내 의견일 뿐이므로 역정을 내진 마시길 바란다.

오늘 글은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는데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같은 날 방문했던 다른 곳에 대해 다음에 정리해서 올려 볼까 한다. 강화도의 있는 곳으로 오늘보다는 짦게 끝날 것으로 생각된다.




(주1) 강화 천도 38년간 : 1232년 7월 6일(고종 19년) ~ 1270년 5월 23일(원종 11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2) 행향도량行香道場 : 행향하다(行香하다) 1.불교 재식(齋食, 법회때 식사)때 시주가 먼저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다. 2.향을 피우다. 제사나 예불(禮佛) 의식 따위에서, 향로에 불을 붙인 향을 넣고 향기로운 연기를 피우는 일을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

(주3) 원찰(願刹) : “사찰 가운데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는 불교건축물” (유의어:원당·내불당·내원당)을 말한다. 다시말해 사찰을 지은 사람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짓거나,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 신라때부터 원찰은 많았고, 고려시대에도 그 전통은 이어졌는데, 고려시대 원찰에는 왕과 왕비의 진영(眞影, 요즘말로 초상화)을 모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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